파도바의 추천 스포트 ... 그 외 관광지편

파도바의 겟토 지구 파도바 최초의 시나고크 흔적. 방화 후에 재건되어 외관은 새롭지만 벽면에 비판이 끼워 넣어져 있다. 현재 내부는 견학 불가.

파도바는 많은 유적이나 미술품이 많이 남아있어 볼만한 곳으로 가득차 있지만 가이드 북에는 소개되지 않다.하지만 도시의 풍경이나 아름다운 유적지는 놓쳐서는 안되는 것 중의 하나. 숨어있는 매력적인 곳을 하나씩 소개한다.


겟토 지구(Ghetto - 겟토)

파도바의 겟토지구 겟토 지구로 들어가는 길에는 이런 표적의 기가 있다.

파도바의 겟토지구 또다른 하나 시나고쿠 흔적이 있는 비문. 이것과 같은 것이 베네치아의 겟토 지구내 시나고쿠에도 있다.

별5
"겟토"란 그 옛날 크리스트 교도의 유태교도 박해에 의해서 유태인이 사는 것을 허가되어 격리된 지구를 말한다.

베네치아에 생긴 겟토는 유럽 최고라고는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하의 파도바의 그것의 역사가 아주 깊다.

파도바에는 중심가에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파도바에는 최초의 시나고크(유태인 교회)가 1548년에 생긴것에서부터 겟토의 역사가 시작된다. 독일인 유태교 신자가 여기에 모아졌다.

1892년에는 2번째의 시나고크가 생겨 유태교 신자인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들이 이 구역에 모아졌다. 시나고크 내에는 교회및 학교등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최초의 벽이 특징적인 적색을 한 시나고크는 1943년 제 2 세계대전시에 반유태교의 박해로 방화가 있었다. 현재는 파도바에 남는 유태교 신자에 의해 1998년에 재건되었다.

현재는 내부를 볼 수 없지만 두개의 시나고크가 있던 건물에는 그 당시의 유태인 박해를 반하는 프레이즈가 쓰여진 패널이 붙여 있거나해서 당시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장소는 피앗트 에르베의 바로 남쪽의 지구이다. 길에 겟토의 기가 걸려 있으므로 곧바로 알수 있다..

시나고크는 Via delle Piazzre와 Via San Martino 에 있다.

파도바 최초의 시나고쿠 흔적

유태교도 박해에 의한 이 최초의 시나고쿠가 생긴 것이 1548년으로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제 2 세계대전의 반유태교에 의한 방화로 후에 재건되었기 때문에 외관은 새롭지만 벽면에는 그 역사를 풍화시키지 못하게 비판이 끼워 넣어져있다. 현재 내부는 견학할 수 없다.

치타 무라타(Città murata)… 벽과 문의 마을

파도바의 모리노문 마을 여기저기에 지금도 남겨진 벽을 볼 수가 있다. 모리노 다리,문. 구시가지 단테 거리( Via Dante ), 북쪽에 위치한다.

파도바의 모리노문 1500년대 건조된 사바나로라 문(Porta Savonarola). 베네치아 공화국의 심볼, 라인온이 새겨져 있다.

별 4
이른바 벽으로 둘러쌓인 마을. 온 도시를 크게 벽에서 둘러싸 그 안에서 자치 활동을 하고 적의 침입을 막았던 구조이다. 이탈리아에는 이러한 구조의 마을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여기 파도바에도 그렇다는 역사가 있어 지금도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파도바의 구시가지를 둘러싸는 벽은 1195년부터 1210년의 공사로 처음 벽이 생긴 후 1400년대까지 파도바를 영토로서 지배하고 있던 카라레이지가의 성을 중심으로 양성된 것. 그리고 그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가 된 파도바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만들었다. 1500년대의 것이 가장 커서 그 주위를 둘러싼 구도로 되어 있다.

벽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몇군데의 요소에 문을 만들어 그곳 이외의 출입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하며 그 시대에 만들어진 문이나 다리등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지금 현재 남는 것은 구시가지를 둘러싼 벽의 일부와 6개의 문. 모두 당시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문 하나가 모리노 다리의 문( Porta e Ponte Molino/ 포르타 , 폰테모리노)이다.

이 다리가 지나는 거리는 비아 단테( Via Dante ). 기원전 40 ~ 30년, 고대 로마 시대에 생긴 거리로 당시 파도바의 번화가였다. 이 다리의 앞쪽은 그 당시에 건설되었지만 그 후 12세기에 재건축 된 것이다. 이것과 같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모리노문과 폰테코르보문( Porta Pontecorvo )이다.

모리노문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일화가 남아 있다. 갈릴레이 Galilei가 1610년 이 문의 상부에 천문대를 마련해 목성을 발견한 것이 이 장소.

지금은 여기를 차나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역사와 현대를 잇는 그야말로“포르타(문)”이다.

모리노문에서 갈릴레이의 흔적을 찾아 보자!

모리노문의 아치에는 갈릴레이의 공적을 칭한 비문이 붙어 있다. 「이 탑에서 단테는 많은 천공을 발견했다(Da questa torre GALILEO molta via de cieli svelo)」.

지금부터 400년도 전에 갈릴레이도 여기에서 하늘의 바로보았다니 왠지 로맨틱하다.


갈렐레오 갈렐레이의 집( Casa di Galileo - 카사 디 갈렐레오)

갈렐레오의 집 갈렐레오의 집 외관. 내부는 1400~1500년대의 프레스코화가 남겨져 있다고 한다.

별4
1500년대 후반 파도바에서 갈릴레이 Galilei가 살고 있었을 때의 주거지이다. 파도바내에서 몇군데인가에 살고 있었다, 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하나가 여기. 실제로 이 장소를 방문해도 「엣? 여기가?」라고 말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현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상당한 명당이다.

도로에 표시가 있기 때문에 그걸로 알수있다.

산탄트니오 교회에서 북쪽으로 뻗는 길 산토 거리( Via del Santo )에서 북쪽을 향해 걸어가면 동쪽으로 꺽어지는 길에 그 이름도 갈릴레이 Galilei 거리( Via G.Galilei )가 있다.


포르티코( Portico )와 산프란체스코 거리( Via San Francesco )

파도바의 포르티코 프란체스코 거리의 오래된 포르티코

별4
포르티코란 아케이드란 의미이다. 파도바에는 길의 여기저기에 포르티코를 볼 수 있어 이것이 또 다른 도시 풍경의 아름다움을 한층 끌어내고 있다.

그 특징은 둥글고 굵은 기둥이 정간격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기둥 사이의 상부는 아름다운 아치장으로 된 모습이다. 거리를 걸으면 자연히 눈에 들어오지만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Via San Francesco/ 비아 산 프란체스코에 있는 포르티코이다.

이 거리 자체는 거리 중에서도 오래된 역사가 있는 거리. 교회나 옛 병원, 갈릴레이의 집이 있는 비아 갈릴레이 Galilei와 성안토니오 교회로도 이어지는 길. 이 길의 막다른 곳(물론 현재는 그 앞으로 도로가 늘어서 있지만)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원형을 가지는 폰테코르보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옛날 주요한 길 중 하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매우 아름다운 거리이므로 꼭 걸어보자.!

두오모의 뒷쪽

파도바 베스토바도 사교관 베스코바도.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 근교에는 교회 관련의 상품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다.

4별
두오모를 주위를 반드시 한바퀴 둘러보자. 뒤편에 우뚝 서있는 탑은 시인 Petrarca가 1300년대에 일시 거처로 사용한 건물이 있다. Canonica/ 카노니카로 불리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것.

또한 그 전에 보이는 것이 1485년대의 건설된 Vescovado/ 베스코바도이다. 여기는 종교 관련의 도서관으로 12세기의 자필 라틴어등으로 기록된 서적등이 보관되고 있다.

어느쪽이나 아주 아름다운 건조물이다.

덧붙여 Petrarca가 생애를 마쳤다고 여겨지는 집은 파도바 교외의 아르쿠 파트라카( Arqu Patrarca )에 남아 있다.

안테노레의 무덤(Tomba di Antenore - 톰바 디 안테노레)

파도바 안테노레의 무덤 안테르노의 무덤이 있는 파도바

별4
전설상의 인물의 묘가 도시 한가운데에 있다. 안테이노레란 고대 그리스 트로이로부터 아드리아해를 건너 파도바의 북동 해변 아드레아라고 하는 마을에 도착. 강을 건너 파도바에 도착해서 거기를 파도바라고 이름 붙인 인물로 여겨진다. 3000년 이상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파도바 창생의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상의 이야기. 사실은 3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로마 제국 붕괴 뒤에 쳐들어간 독일 또는 헝가리의 병사의 뼈의 일부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건물의 뒷쪽 건물은 파도바 시청이다. 그 이전에는 재판소로서 이용되었지만 원래는 산 스테파노 교회의 수도원이었다.

또 길을 사이에 둔 건물은 단테의 주거지였다고 여겨되는 건물이 남아 있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가 파도바 영주의 칼라레이지가에 의해 여기에서 보호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문학 최대의 시인, 르네상스를 낳은 단테

피렌체로부터 쫓긴 단테가 파도바 영주의 칼라레이지가에 의해서 보호되었던 주거지.

1306년 칼라레이지가에 의해 단테를 여기에 보호했다고 여겨지는 비판이 붙어있다.